조선 개국이후 대혼란기와 개국 무신들의 이합집산으로 왕자의난이 일어날때도피해가 없었고 계유정란 단종복귀 거사 때 부정공파 사문, 숭문, 철산 삼조의 참화를 끝으로 연산조 후 5대사화 인조반정 등 내란에서는 별 피해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.
우리집안 선조들은 려조(高麗朝) 두문동 출신으로 이조조정 출사를 불사하여 사화의 희생자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. 여기서 성찰해보자.
그러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동학란 등 국가의 위기와 외침에 대항하는 민간봉기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있었다.
이처럼 오종문(吾宗門)을 포함한 호남인들은 천도교 박해 동학농민봉기 반일 반독재 투쟁에 의분(義憤)을 참지 못하고 권력자의 부정부패에 대항하고 저항하다 수만명의 희생자들이 발생했다. 그 희생자가 호남지역에 편중된다.
권력을 탐내는 사화와 정변에는 타지역에 비해 희생이 적다.
부정과 불의한 것을 묵과하지 못하는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 일가? 역사적으로 일반적 호남인의 양심 발현이다.
우리선조들께서는 임진란과 정유재란에서 가장피해가 컸다고 고 춘산, 종한, 정훈, 대족장으로부터 들은 바 있다.
의병에 참여한 분들이 3남 각지로 흩어지고 특히 많은 정읍공 후손 분들이 어떤 사명으로 평양 남포만호 원산만호 황해도지역 만호 등 북쪽 수군 또는 의병에 편입되어 600여명이 행불되었는데 그 손의 많은 수가 평양근처에 집성하여 해방전 평양파보를 만들고 일부 왕래가 있었다고 하며, 그 평양 파보를 주암리 고(故) 상구씨가 보관 중 가보(家寶) 취급을 하시면서 당시 종사연구원들이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.
그 족보는 중근대(中近代)는 동일하나 선대(先代)가 다른 점이 있어 호서파와 연계되지 않았을가로 정리되었고 호서파와 합본 시 자료로 삼겠다고 어른들이 말씀 하셨습니다.
그 손 일부가 강원도 원주 지방으로 내려와 130호 정도의 가승(家乘)을 전래하여 보관하고 2010년대에 신판 보책도 발간하였습니다.
그 종친회장이 경동약시장 청수장 한의원으로 본인은 수차 처방받은 적이 있습니다. 그 자제가 KBS 아나운서 조재익 이었는데 지금은 간부급일 것이고 한 때 원주을구 더민주 공천이 거의 확정단계에서 선거자금 지원문제로 취소된 적이 있습니다. 조재환 전의원이 잘 알고 공천개입도 했습니다. 본인하고도 절친이었는데 그 집안 상대(上代)가 평양파라 들었습니다. 정읍공 후손이지요. 생전에 종친사업에 열정이 대단했습니다
생사진퇴 무괴의자! 두려움 없이 살아가라는 지침을 주신 오(吾) 4세조 고려 5은(隱) 충신 농은공 부원군 충헌조의 유시가 오늘까지 전해옵니다.